책을 읽으면서

1.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biumbium 2006. 5. 4. 23:29

 

1.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지식의 영역에서 소유와 존재의 실존양식의 차이는 “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와 “나는 알고 있다”라는 두 가지 어법에서 드러난다.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함은 이용할 수 있는 지식(정보)을 획득하여 확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앎은 기능적인 것으로 생산적 사고과정의 한 부분이다.

 

존재양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지식[앎]의 특성에 대해서는 석가모니, 헤브루 예언자들, 예수, 에크하르트 수사, 지크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 등으로 대표되는 사상가들을 떠올리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보는 앎이란 이른바 상식적 지각이 가져다주는 기만성(欺滿性)을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물리적 현실에 대한 우리의 상(像)이 “참으로 실재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참이며 자명하다고 여기는 것의 상당 부분이 주변 사회의 암시적 영향으로 야기된 미망[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따라서 앎[깨달음]은 미망을 깨뜨리는 것,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disillusionment, Ent-täuschung)”에서 비롯된다. 앎은 표면을 뿌리까지 뚫고 들어가서, 그래서 근원에 이르러서 적나라한 현실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진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을 뚫고 들어가서 비판적이고 능동적으로 진실을 향해 가급적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창조적 침투의 특질은 남성의 성적(性的) 침투의 예에서 보여지는, 인식과 사랑을 의미하는 헤브루 어 jadoa에 내포되어 있다. 각성자 석가모니는 사람들에게 “깨어나라, 물질의 소유가 행복을 가져온다는 미망에서 벗어나라”고 설법한다. 헤브루 예언자들은 “깨어나라, 너희들이 섬기는 신은 너희 손으로 빚은 우상에 불과한 환상임을 알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라고 말한다. 에크하르트 수사는 인식에 관한 자신의 표상을 여러 차례 표현했다. 이를테면 신을 인식하는 문제와 상관하여 “그 인식은 어떠한 다른 사상도 첨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식 자체가 떨어져나와 앞으로 달려나아가서, 알몸 그대로의 신을 접하고 자신의 존재 안에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이다”(J. Quint, 1977, 238쪽)라고 말한다(“적나라함”과 “알몸으로”라는 말은 에크하르트 수사와 <미지의 구름>을 저술한 익명의 그의 동시대인이 즐겨 썼던 표현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신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는 요구는 환상을 요하는 상황을 파괴하라는 요구이다.”(K. Marx, 1971, 208쪽) 자기 인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개념은 “무의식적 현실을 알기 위해서는 환상(‘합리화’)을 파괴해야 한다”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이 모든 사상가들이 전념한 문제는 인간의 구원이었고, 그들 모두 사회적으로 인정된 기존의 사고도식을 문제로 제기했다. 그들에게 앎[각성(覺醒)]의 목적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절대적 진리”를 확인하는 데에 있지 않고, 인간이성이 스스로를 확증하는 과정에 있었다. 깨닫는 자[der Wissende, 각자(覺者)]에게는 무지(無知)의 상태도 앎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좋은 것이다. 두 상태 모두 인식과정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의 무지는 사고(思考)의 게으름에서 오는 맹목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존재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깊이 아는 것인 반면, 소유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많이 아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교육제도는 학생들에게 소유물로서의 지식을 공급해주려고 애쓰고 있고, 그 지식은 이를테면 그들이 훗날 살아가면서 확보하게 될 재산이나 사회적 특권에 상응한다. 그들이 획득한 최소한의 지식은 장차 그들이 일을 원활히 하는 데에 필요한 양만큼의 정보인 것이다. 거기에다가 모든 학생은 각기 자신이 지닌 값에 대한 느낌을 높여줄, 그리고 앞으로 그가 누릴 사회적 특권과 상응하게 될, 크거나 작게 포장된 “사치스러운 지식” 꾸러미를 덤으로 받게 된다. 학교란 학생들에게 인간정신이 쌓아온 최고의 업적들을 전달해주는 기관이라고 일반적으로 주장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이런 지식의 꾸러미들을 생산하는 공장에 불과한 것이다. 수많은 대학들은 이런 환상을 탁월하게 부양하고 있다. 인도의 철학과 예술에서부터 실존주의와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메뉴들이 끓고 있는 부뚜막”이 제공되고 있고, 학생들은 각자 이것저것 조금씩 맛을 본다. 학생들의 자발성과 자율성이 위축되지 않도록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라고, 하다못해 한 권의 책이라도 끝까지 읽으라고 강력히 권하는 경우는 찾아 볼 수가 없다.(이반 일리치 Ivan Illich, 1970 가 우리의 학제에 대해서 가한 신랄한 비판을 비교할 것). (프롬, 소유냐 존재냐. 차경아 옮김, 까치, 1996, 62-65쪽)]

 

프롬(Erich Fromm)의 <소유냐 존재냐>에 나와 있는 글입니다.

프롬은 실존 양식을 소유의 양식과 존재의 양식 - haben과 Sein, have와 be - 으로 구분합니다. 오늘 흔히 들을 수 있는 웰빙이라는 것도 프롬이 말하는 존재(be)의 양식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웰빙이 상업화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미 웰빙이 아니라 소유로 변질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말입니다.

 

나는 이 책을 가끔 다시 읽어봅니다. 내 강의가 삶을 위한 것이었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소유를 위한 지식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반성합니다.